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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생활정보

미국내 한국인 최초의 이민 역사와, 오늘날 까지,미국 교민/유학/비지니스 까지 다 알려드립니다.(미국 중부,오클라호마까지)⭐

by 러블리 랠리 2021. 8. 23.


"미국 내의 한국인의
이민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네, 제가 경험하고, 공부하고,
체험한 미국내 한국인 역사를
자세히,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미국내 아시안이라면, 중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중국인들의 이민역사는 1865년대부터, 미국 중앙을 가로지르는 철도 공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수많은 중국인들이 미국 내 이주를 하였고, 역사도 오래되었습니다. 1882년에는 중국인 이민자의 수가 125,000명이 넘어서 드디어 국회에서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되었고 중국 이민은 일체 중단되기 전까지, 이후로 미국 정부는 감사의 표시로, 위험한 철도공사에 많이 사망한 중국인들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땅을 중국인에게 보상으로 주기도 하였습니다.



반면, 미국내 한인들의 역사는 100년이 넘고, 매우 짧습니다.미국에 최초 한인 이민은 지금부터 백 년 전, 1903년 1월 13일에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01명의 한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습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 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 100년 정도의 미국 내 한국인 이민사를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 한국인 최초로 하와이로 이주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하와이에 미국의 기업인들이 들어가 본격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입니다.사탕수수 기업이 번창하여 한 때는 설탕 수출이 하와이 총수출액의 95%나 차지할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와이 본토인들을 농장에 고용하였으나 일손이 모자라게 됨에 따라 외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여야만 했습니다.


중국인들이 하와이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까지 많이 밀려와 일함에 따라 이들을 두려워한 연방정부는 1882년 5월 6일 Chinese Exclusion Act라는 악법을 만들어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인들의 이민을 금지하였고, 다시 이 법을 수정하여 계속 그들의 이민을 막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노동력 부족 현상이 일어난 하와이에는 1890년대를 전후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와서 농장에서 노동하게 되었습니다.사탕수수밭의 한인들 1903년 1월부터 1905년 7월까지 하와이에 온 한인 노동자는 7800여 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일은 매우 고되고, 먹을 것도 마땅치 않고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구한말 한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한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 한국인들 캘리포니아 이주


사탕수수회사가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함에 따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는 노동력이 계속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장주들은 한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할 계획 하며, 한인이 캘리포니아로 이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캘리포니아에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 1900년대 이후 미국 한국인 이민 현황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한국 전쟁을 참여하면서, 전쟁 후, 한국인 부인들을 데려 오면서, 한국인들이 미국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미국내 한국인을 거의 볼수 없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돌아가신 캔자스에 사셨던 미국인 시어머니가 그녀의 사촌들이 한국전에 돌아와서 두 사촌이 각각 한국인 부인을 데려와서, 사촌들이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말씀해 주신적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지금까지 미국 군인들이 한국 근무를 하고, 한국 부인들을 계속 미국에 데려 오고 있습니다.


1965년대 이후로 1970년대 한때 불어던 '아메리카 드림'을 품고, 수많은 가족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한국인 교미들이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와서, 세탁소나 청소, 설거지와 식료품점,식당을 하면 투잡, 트리잡을 가지면, 아침부터 밤까지, 7일 내내 열심히 일하여, '헝그리 정신'으로 아메리카드림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는 한국내 해외여행 자율화와 미국 유학 자율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학생들이 어학연수 및 유학으로 미국에 오면서, 결혼과 취업으로 미국에 계속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LA에 1991년과 1992년 4ㆍ29 폭동 사건이 일어나서, LA와 뉴욕에서 한흑 분쟁으로 큰 고통 90년대를 지나면서 전국의 한인사회는 다른 소수계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2000년대에 와서는 계속된 미국 유학과, 투자 이민 등으로 미국 내 한국인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또한 한국인 입양인도 미국내 많이 있습니다.과거에 비해 신규 이민 줄고있지만 이민 2,3세 늘어 한인혼혈 포함 한 한인인구는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반갑게도 미국내 한인이 정계는 물론 재계와 문화계 등 다양한 한인 리더들이 곳곳에 포진해 코리안의 명성을 높이고 있고,한때 복수국적이 허용되고 재외선거권이 주어지는 등 한국과의 거리도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합니다.1998년 한국 외환위기 IMF때도 미국 교민들은 금을 모아 한국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한인 이민의 80%는 유학ㆍ취업 등으로 온 일시체류자들이 영구 정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한인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미국에 동화되면서 한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는 바람직한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내에서도한류 바람이 불어, 위상도 좀더 높아졌습니다.




■□ 미국 이민 교회 역사 들음


미국 교민들은 대부분 한인 교회 커뮤니티를 형성했습니다. 한국인이 가면 교회부터 짓는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미국 생활에 한인교회는 많은 도움을 주는 곳입니다.



2년 전,'미국 한인 연합 장로교회'에서 주체하는 썬 대회, 중남미 지역에 샌안토니오에 몇몇 교인들과 다녀왔었습니다. 강사님이 프레젠테이션 중 한국인 미국 역사 중,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미국에서 LA 쓴 기록을 발견하고 보았는데, 한자와 한문 병행과 영어 작문으로 회의 내용을 수록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이 왔었습니다.

36대 장로교 썬대회 중남부


정결한 한글과 한문으로 회원 참석 인원과 교회 청년들을 당시 퍼레이드에 참석시키겠다는 회의 내용을 영어로 문법 하나 틀리지 않고 기록하셨습니다.


당시, 조선말 그래도 배우신 선조들이 하와이 수수밭에서 몇 년 일하다, 미국 본토 LA에 정착해서,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힘들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교회 봉사와 회의를 하며, 꼼꼼히 기록을 남긴 것들을 보고, 그들의 성실함과 열심히 참 와닿았다. 한 100명 참석하는 장로교회로 보였는데, 현재는 아쉽게 그 교회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 이민 교회의 오랜 역사, 이 미국 땅에서 남모르게 고생하면서 열심히 신앙으로 살아간 선조들의 역사를 보게 되니,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오래전 황무지 같은 미국에 살았던, 그들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 미국 중부에서, 그분들의 이민 생활



미국 중부는 미국의 대도시와 다르게, 지금도 한인 교민이 많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많은 한인 오클라호마 교회에 나이 많으신 권사님들은 80대를 바라보는 70대 후반이 많이 계십니다.개인적으로 그들이 이 미국을 어떻게 정착을 하였고 성공하셨을까, 이민의 역사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70대와 60대이신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처음에는 웃음으로 시작되었지만, 초기 미국 이민의 교훈과 아픔도 엿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50년 전 대부분의 20대 초반에 미국에 미국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오셨는데, 김치를 담아 먹으실 수 없어서 양배추를 이용해야만 했습니다.당시 한국의 재료들을 살 수 없었고, 떡이 먹고 싶어서 매우 고생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 내 한인들의 한국 음식 솜씨는 한식당에도 갈 수 없어서 대부분 집에서 해 먹으니, 한국 음식 솜씨가 다들 뛰어나십니다. 도토리 묵도 잘 하시고, 정말 음식 솜씨들이 대단하십니다.


또한, 어떤 나이 드신 권사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미국에 갓온 미군 부인인 한국인은 레스토랑에 가도 영어로 할 줄 몰라, 닭고기 먹고 싶으면 , "꼬꼬댁". 소고기를 먹고 싶으면 "무~우" 소리를 내었다는 우스개 소리, 듣고 한참 웃었지만,초기에 영어를 못해서 얼마나 서러움이 많았을까? 가련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나이 많은 권사님은 가난한 미국 남편 때문에 사랑하는 강아지를 한국에 두고 온 것이 제일 마음에 아픈데, 그 강아지가 주인이 떠나자 밥도 안 먹고 사랑병으로 결국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녀는 아직도 눈물을 글썽이였습니다.


많은 그녀들의 미국 이민의 초기 삶은 아프기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견디며, 인내로 이루어내 이민의 삶을 끝가지 견디어, 성공으로 이어가서 들으면서 기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민 초기에 레스토랑에서 설거지, 청소 등부터 미국 노동자의 삶으로 직장생활을 대부분 시작했는데, 대부분 열심히 사셨습니다.


지금도 이분들은 나이가 드셔도 지금까지 영어 공부를 틈틈이 하시며, 열심히 사셔서 이제는 자녀들이 의사들로 약사로 의료계로 성공한 것을 보니, 이 나이 드신, 미국 교민인 권사님들이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필자는 그래도 학교에서 영어 발음을 제대로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세대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그분들보다 배움이 더 있어 그녀들 보다, 좀 더 쉽게 미국 생활 정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이 드신 이분들의 그들의 인내와 인생의 지혜와 열심에 미치기에 어려웠습니다.


이민생활을 하는 필자도 이렇게 연륜이 많고, 지혜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참으로 도움이 되었었습니다.미국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미국 중부(오클라호마) 이민사 이야기



미국 오클라호마는 미국 서부, 동부에 비해 한인이 매우 적습니다. 아직도 교민의 수가 5,000명 정도라고 휴스턴 영사관에서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2005년 이후,오클라호마에 좋은 많은 대학들이 있는데 유학하기 좋다고, 테솔및 교환학생 유학생들도 많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 이민사를 들을 기회가 있어 나누어 드립니다.



같은 교회 다녔던 20대 초 나이에 가족이민으로, 캘리포니아에 계시다, 오클라호마에 40년째 사시는 어느 집사님께, 오클라호마의 한인 이민역사와 교민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중한 말씀이라 오클라호마 교민 이민사로 남겨 봅니다.오클라호마는 미국 중앙에 있어, 유명한 공군부대와 육군부대등이 있습니다.



"오클라호마에 40년 전 미국 부대가 아닌, 이곳에 집을 장만하여 정착 하였 을때, 이 동네에 한국인 가족은 우리가 처음이었지... 대부분 한인들은 미군 부대에 살고 있었어.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감시하 듯 쳐다보았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폿카혼타스'라고 불렀지... 그 뜻은 미개인이라는 뜻이야~

그러던, 미국 독립기념일 축제가 동네에 있었는데, 아내는 에그롤을 많이 만들어서, 동네 사람을 에게 돌렸지... 그랳더니,사람들은 우리를 받아들였어...

그 이후로 일주일 동안 거라지를 열어 놓고 여행 가도 물건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이웃이 돌보아 주었단다.

지금도 앞집 과도, 40년 내내 좋은 이웃이 되었단다."





오클라호마에 14년 된 필자에게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직장에서 가끔 텃세가 너무 심해서 힘든 적이 매우 많았는데, 아직도 한국인이 많지 않은 오클라호마에 그들의 심정과 경험이 동감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미국 소도시는 한국인을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어느덧 오클라호마가 살기 좋은주로 비지니스도 하기 좋다고, LA와 뉴욕, 달라스에 오클라호마로 이주도 하는것 보면, 오클라호마 미국 한인교민도 차츰 늘고 있습니다. 미국민도 대도시에서 미국 안전하고 살기좋은 중소도시로 이주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오클라호마에 오래사신,어느 집사님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어느 70대 인자한 노 집사님은 오클라호마 조그만 도시에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의사로 30년 이상 일하시다가 산부인과 의사로 은퇴하셨는데, 그 작은 타운은 거의 90% 이상인 인종차별이 심한 백인 동네였습니다. 그곳에서 외국인 산부인과 의사로 동네 많은 아이들을 받았고, 평판도 좋아 돕은 직위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은퇴 후, 그동네에 한인으로써 좋은 평판으로 노후의 미국인 남편을 잘 살펴주며, 훌륭한 인품으로 교회에서도 존경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이민 역사 말씀을 해주신, 오클라호마 교민분들께 감사드리고, 이민 역사의 소중한 자료로 기록해 놓겠습니다.



지금까지, 미국 내 한국인 이민의 시작과 역사와 최근 근황과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 이민사까지 경험과 들은 이야기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미국 내에서 대부분 한국인은 성실하고, 자녀교육 잘 하고, 열심히 사는 소수민족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한인의 이민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넓은 땅, 천연의 자원, 민주주의와 기회의 땅으로 한국보다는 비즈니스 하기로 좋은 곳으로, 유학과 한국인의 이민은 늘고 있습니다. 미국내 한국인도 점차 미국내에서 영역을 확장하여, 성공하고 올바른 영향력을 미치며, 좋은 이민 이야기를 계속 써 가면 좋겠습니다.



미국 이민 역사를 오랫동안 정리하여 기록해 보았습니다. 교민으로써 미국 이민역사를 순수한 목적으로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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